<이정명, ‘뿌리깊은 나무’를 읽고>
靑林 金兌龍
2006년에 소설로 출간된 이 책은 70만부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으며, KBS는 이 내용을 역사드라마로 제작하여 방송하였다. 세종 당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 위에 천문,수학,의학,음운학,서지학,철학체계 등 방대한 지식을 더해짐으로써 훈민정음 창제 시기의 여러 사건들이 매우 드라마틱하고 리얼하게 전개된다. 소설 다빈치 코드를 넘어서는 치밀하고 긴장감 높은 구성 덕택에 책을 잡고 있는 내내 글 읽는 재미로 입안에 단 침이 고여 있었다.
소설은 중국의 거대한 힘에 의존하고, 또 그 힘에 기대어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사취하려는 경학 지상주의자들과 조선 백성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자주적 평화적 문화를 갖추려는 이용후생 세력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심종수는 성리학, 혹은 도학을 통한 궁리와 그 수단으로서 오직 한자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신진 집현전 학자들이 20년에 걸쳐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이룩해 낸 각 종의 이용후생적인 연구들을 폄하하고 훼방한다. 그들은 세종을 보필하였던 과학자 장영실, 음악가 박연, 고려사 편찬학자 윤회, 농업 실무서인 농사직설을 지은 정초 및 음운학과 인쇄학을 연구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핍박하거나 살해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세운 기득권 질서, 즉 형이상학에 대한 이론적 우월함과 한자의 사용이라고 하는 난이도 높은 진입 장벽을 세우기 위해 온갖 사악한 수단을 거침없이 구사한다.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사대하는 것이 국가 차원에서 실익이 크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잘 짜여진 그들만의 이익의 고리를 지켜내려고 몸부림한다.
세종은 태종에 의해서 억울하게 제거당한 장인 심온의 부당한 죽음을 애도하면서 앞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혼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서책 “고군통서”를 지었는데 이 책을 찾아내어 명나라에 고자질하겠다는 사대주의자와 이 책을 사수하여 국익을 지키겠다는 정인지와 성삼문 등의 민족주의자이자, 실용학문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집현전 학사들 간의 대결이 스토리의 근간을 이룬다. 소설은 훈민정음의 제정 원리와 창제 과정을 담아내면서 무게와 깊이를 더해 간다.
한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각 종의 글자와 음운학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인체의 발음구조와 발성원리를 반영하여 구성되었다. 글씨의 형태를 결정하는 철학적 기반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존재하고 운영되는 기반인 음양과 오행이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태극으로부터 생성된 우주의 기운이 다섯가지의 요소, 즉 금,목,수,화,토를 이루고 그 기운은 서로가 영향을 주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원리를 적용시키면서 소설의 씨줄과 날줄이 태어난다.
이 책을 읽은 후 음양오행에 대해서 공부를 더 해 볼 생각이다. 음양오행론에 입각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수학적인 추론들은 이미 천년 이전부터 수식화되어 있었다. 또 그 이론이 천체에 적용되고 있는 것을 엄밀한 기록과 경험을 통해 고증되어 왔으며 그 결과를 반영하여 혼천의나 간의를 제작.사용해 왔다. 이러한 고급문화를 심화시키고 일상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이용후생적인 문물이나 도구를 제작하여 산업화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은 한글의 창제와 배포를 끝까지 방해했던 데서 보았듯이 매판.사대에 물든 기득권 세력들 때문이다. 역사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수구반동의 세력을 떨쳐냈어야 했으나 세종조 이후 그들에게 덜미 잡혀 온 것이 우리 역사의 현주소다. 이 소설은 수구반동이 진보라는 역사의 바퀴를 얼마나 극악스럽게 움켜 쥐고 있는지 웅변하고 있다. 또 우리는 서구식 교육 철학과 사조에 기울어져서 우리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가르치지 않은 국가 교육기관 때문에도 음양오행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점도 뼈아프다.
수학자 김용운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비교문화론에 대해서 쓴 저서 “風水火”에서 오늘날 한반도인의 문화와 사고방식의 원형은 라당연합군이 663년 왜와 백제 연합군 27,000명을 백강전투에서 수장시킨 데서 결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의 압력에 밀려 대동강 이하에서 안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한민족은 어떤 일에 대해서든 한반도를 넘어서서, 즉 대륙이나 해양에 진출하여 세계를 경영해보려는 방식의 사고력을 갖지 못하게 거세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 땅의 위정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대국에 의존하는 사대.매판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사조는 1,350년간 동안 별다른 저항없이 자연스럽게 이 땅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요즘 8조원을 들인 전투기를 사들이는 사업에서 국가 고유 기술을 확보하는 데 우선 가치를 둘 것이냐, 큰 형님 미국의 심기를 살피는 것을 앞세울 것이냐는 문제를 보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 김구를 천하 제일 기회주의자 이승만 뒤에 세우겠다는 취지로 역사책을 다시 쓰겠다고 박박 우기는 자들을 보라. 매판사대주의의 표본이다. ‘뿌리깊은 나무 소설’ 속의 기득권자 대제학 최만리나 직제학 심종수의 판박이짓이다. 매판.사대에 물든 수구 세력의 뿌리는 깊고 거대하다.
매판.사대주의 기득권 세력이 세종조 이래로 어떻게 변해 왔는지 정리해 본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 및 장자였던 월산대군을 제치고 등극한 성종 대의 공신 세력들 부와 권력의 집중화를 통해 사회 모순 심화
이에 맞선 사림은 4대 사화로 희생 è 명종조 이후 사림 세력이 정치권력을 확보하지만 세력이 분화되면서 구조적 당쟁 관계 성립
사림층이 주도하는 자체적인 내부 혁신 실패에 따라 임진왜란 병화 불가피
임진왜란 중 실시한 속오군(양반,상민,노비 구분없이 공을 세우면 면천하고 벼슬) 및 작전제(전답 경작권 고루 배분)로 사회변화 가능성 도모
정유재란 이후 기득권 반발에 의해 속오군,작전제 폐지하고 과거의 부당한 체재로 복귀 è 김덕령 등의 의병이 처벌되자 의병 활동 위축, 사회 개혁 후퇴
선조 이래로 집권층이었던 서인(후일 노론)이 인조반정 이후 극단적 사대주의적 경학 및 사장학으로 흐르면서 병자호란 병화 è 사대주의 세력릐 장기집권 후유증 때문에 사회 발전동력 쇄락 è 효종 때 김육이 대동법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만 약간 개선
정조가 개인적으로 남인 세력에 기대어 사회개혁을 시도했으나 계층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국가적 수술은 불가
안동김씨 세도정치 기간 중 3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짐 è 극심한 민란
지속적인 외세 침탈 속에 지도층 중심의 개혁운동(위정척사, 갑오경장, 만민공동회 애국 계몽)이 있었으나 내재적 에너지가 부족하고 외세가 너무 강곤하여 모두 실패
동학 운동만이 진정한 내부 혁명(척양척왜,제폭구민,광제창생)의 기회 è 양반 기득권 세력들이 조직한 민보군이 보부상과 함께 일본군을 지원하고 공동작전을 펴서 동학도 30만명 학살
일제 강점기하의 친일, 해방 정국 이후의 친미 è 5.16 세력 집권 이후 산업화에는 성공하였으나 계층간 통합에는 실패 è 현재 집권층은 분단 현실을 핑계삼아 매판.사대를 공고히 하고 있음 è 그나마 산업화 성과마저도 수구반동 세력의 준동 때문에 내부적으로 궤멸되어 가고 있음
결론; 매판 사대에 기반을 둔 기득권 세력을 혁파하는 것은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 주어야 할 사명이고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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